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리히 2세 (문단 편집) == 황제 즉위와 이탈리아 군사 작전 == 하인리히 2세는 1013년에 [[성직자]]들의 요청으로 다시 이탈리아 반도로 가게 되었다. 아르두윈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르두윈은 처음에 이브레아의 궁전에서 하인리히 2세에 대항했으나 [[수도자]]가 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 후 하인리히는 바로 [[로마]]로 가 1014년 2월 14일 교황 [[베네딕토 8세]]에게 황제의 관을 받았다.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에서 의무를 수행했으며 독일을 다스리는 공식 군주로 지명되었다. 그는 5월에 독일로 돌아갔다. 1020년에 [[교황]]이 하인리히 2세와 [[밤베르크]]에서 만나 그의 대성당을 축성했다. 마인츠와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간의 논란을 해결한 다음에 [[베네딕토 8세]]는 롬바르디아의 제후들이 그리스인들에게 항복하여 남쪽에서 힘을 키우고 있는 [[동로마 제국]]을 막기 위해 3번째 군사원정을 하라고 설득했다. 1022년에 그는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남이탈리아로 가기 위해 아드리아 해안으로 출발했다. 하인리히는 카푸아 공국을 지배할 목적으로 우선 [[쾰른]] 대주교 필그림을 보냈다. 필그림은 작은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티레니아 해 연안을 따라갔다. 역시 작은 규모의 3군은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 포뽀가 이끌고 트로야의 동로마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하인리히와 합류하기 위해 아펜니스 산맥을 통과하여 갔다. 필그림은 카푸아 [[공작(작위)|공작]] 판둘프 4세를 사로잡았고 카푸아와 살레르노 공국으로부터 충성을 받아냈으나 3군 모두 트로야를 함락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하인리히 2세는 카푸아 공작을 처형하려고 했으나 마지막에 필그림의 만류를 들어 대신 쇠사슬로 묶어서 독일로 보내 다시 테아노의 [[백작]]으로 임명했다. 비록 중요한 목표는 실패했지만 하인리히는 남쪽에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지식을 전파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파비아에서 열린 시노드에 참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